▣세상사는이야기/종교방

직지심경 85

청산(푸른 산) 2011. 7. 17. 21:04

 

직지심경 85 /남양혜충 국사 9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

 

忠國師因僧호대 作麽生相應去하야 師云 善惡不思하면 自見佛性이니라 又佛與衆生一時放下하면 當處解脫이니라

 

혜충국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하여야 상응할 수 있습니까?”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으면 저절로 불성을 보느니라. 또한 부처와 중생을 일시에 내려놓으면 그 자리가 곧 해탈이니라.”

 

해설 ; 어떤 스님이 물은 “어떻게 하여야 상응할 수 있습니까?”라는 말은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와 상응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참다운 진리에 상응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깨달음의 경지란 것도 결국은 참다운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불성을 본다.”라고 하고, 또는 “해탈”이라고 한다. 혜충국사의 대답은 “불성을 보는 것이나 해탈하는 것이나 모두가 선과 악을 생각하지 말라.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생각을 일시에 다 놓아버려라.”라고 하였다. “선이다 악이다.”라고 하는 상대적인 관념에 머물러 있거나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차별의식에 매여있으면 그것은 견성도 아니며, 해탈도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을 견성과 해탈에 두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무튼 그 성스러운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은 부처고 악은 중생이며, 옳은 것은 부처고 틀린 것은 중생이며, 또 부처는 해탈이고 중생은 속박이라고 생각하면 진정한 해탈과는 십만 팔 천리나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진리의 경지란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그것을 행하는 그 자체와 그 사실이 곧 참다운 성품이므로 그 사실에 눈을 뜨면 진리와 상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진정한 해탈은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차별에 얽매이지 않을 때 참다운 해탈이다. 왜냐하면 본래 선과 악의 차별이나 부처와 중생의 차별이 없는데 그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임시방편으로 가설하여 가르친 것에 집착하여 실제로 그와 같은 것이 있다고 착각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육조혜능(六祖慧能)대사가 야밤중에 오조홍인(五祖弘忍)대사로부터 깨달음을 인가 받아서 가사와 발우를 들고 멀리 도망을 하였는데 장군 출신 도명스님이 뒤쫓아 와서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할 적에 하신 법문은 만고에 빛나는 명언이다. 그것은 혜능스님의 첫 법문인 샘이다. “불사선 불사악(不思善不思惡).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선과 악이라는 상대적 편견에 집착하면 참다운 이치는 꿈에도 보지 못한다. 선을 행하던 악은 행하든 할 줄 아는 그 자체가 위대한 불성의 현현이다. 그것 외에 달리 다른 것에 마음 쓰지 말라.”라고 부연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해탈이라는 것도 바로 그 자리이다.   

 



 

 

 


 

                           대한불교진흥원 무비스님 

 

                    

 

 

一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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