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항/통영이야기

통제사의 길 사전 답사기2 원문성은 어디인가?

청산(푸른 산) 2012. 9. 1. 21:06

 

 

 

通政大夫行咸安郡守前別餉使吳公宖默永世不忘碑

오횡묵의 함안총쇄록에는 이 비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890년 3월20일 기축 동이 틀 무렵 출발 하였다.이른바 맞이하는 명색 관리들이 모두 대령 하였다가

앞에서 인도 하려다 엄히 타일러서 이들을 물리쳤다.

종종 걸음으로 걸어서 원문으로 들어가니 문안에 새롭게 만든 비석이 있었다.높이가 한길 남짓 되었다.

머리는 치마모양 이었고 부는 거북모양 이었다.우뚝 서있었다.이것을 보니 비석 전면에는

"통정대부함안군수전별향사오공횡묵영세불망비"라고 세겨져 있었다.그 비명은 다음과 같다.

(영외의 복성이 밝게 빛나셨도다.임금님의 근심을 나누어 갖고 남쪽 마을에 오셔서 은택을 베푸셨도다,

은혜와 사랑을 입은뒤에 흉년임을 잊고서 칭송이 마을에 자자하고 명성이 조정에 까지 들렸으니 아름답구나

우리 임금님 이시여.이런 좋은 신하가 있으니 이것을 단갈(短碣)에 쓰니 백세토록 아름다운 이름이 전해지기를 .)

뒷면에는 이렇게 세겨져 있다.(우리 성상께서 즉위 하신지 어언 22년 영외 바닷가 10여 주군이 크게 밝아 지었네.

병술년 봄 백성들의 은혜가 막히어 굶주렸을때 노약자들은 도랑에 굴러 죽었고 어린이 들은 다 팔려 나가거나 들에서 굶주려 죽어 도랑을 다 메웠으며 봄의 들판은 황폐하게 내버려져서 이 남쪽 밭에는 거의 한사람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아 성후께서 이봄에 남쪽을 돌아보시어 모든 읍에 진휼 하실걸 생각 하셨다.

이 암흙같은 늪에 빠져서 괴로웠을때 별향사를 특별히 차임 하셔서 남쪽의 고을을 다스리게 하니 공이 명 받길 성심을 다하였다.이 땅에 오셔서 형제 잃은 사람과 부인 잃은 사람을 조상 하시고 굶주린 시체를 묻어 주시고 처노를 속량해 주시고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셨다.무릇 4개월동안 산자를 규휼 하시고 죽은자를 묻어 준것이 대개 10만은 될 것이다.

공께서 승상의 뜻을 깊이 체득하고 친히 진휼을 챙기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모를 봉양케 하고 자기 처자를

보호케 하니 남방이 태산과 같이 편안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공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하는데서 나와서 그렇게 된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작은 비갈에 세겨서 이 업적을 잊지않게 기리기 위함이다.)

 

통정대부행함안군수전별향사오공횡묵사적비. 

 

원문성이 애조마을 바닷가와 원문만의 바닷가 까지 성을 쌓아서 성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거제 통영을 들어올 수 없다.

옛 원문성은 지금의 원문고개가 아니란다.골목 아래로 내려갔다.

 

 골목을 내려오니 원문 새미가 나온다.이 새미가 성안새미라고 한다.(붉은 지붕)

 

우물앞에 있는 건물지가 원문성터라고 한다.현재는 원문33번길이며 2층의 건물이 있다.

작년 장문리 해안길 탐방때 보았던 각종 효렬비등 약 다섯기의 비석을 보았는데 정영 이 길이 거제로 가는 대로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거제가는 길과 나눠지고 여기서 성안길과 성밖길로 나눠 진다고 한다.

 

 

 

여기서 죽림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새로 길을 내고있는데 이곳에서 함안군수오횡묵 사적비가 두동강이 난채 발견 되었다.

비석의 지붕돌도 있으며 이번 도로 공사시 파손 되었다.

오횡묵의 함안총쇄록에는 이 비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통영 문화원 발간 통영문화 2006년 제7호의 향토사 함안 총쇄록에 나타난 통영의 모습편의 100페이지에 번역 해 놓았다. 

 

"1890년 3월20일 기축 동이 틀 무렵 출발 하였다.

이른바 맞이하는 명색 관리들이 모두 대령 하였다가 앞에서 인도 하려다 엄히 타일러서 이들을 물리쳤다.

종종 걸음으로 걸어서 원문으로 들어가니 문안에 새롭게 만든 비석이 있었다.

높이가 한길 남짓 되었다."

 

"머리는 치마모양 이었고 부는 거북모양 이었다.우뚝 서있었다."

"다 읽고 나서 생각 하기를 이것은 곧 당연히 해야할 직분을 했을 따름인데

불후의 업적 이라고 이렇게 기렸으니 부끄러울 뿐이다.그래서 한수 읊었다."

 

남쪽지방의 흉년을 왕명에 의거해 구제 하려고

바닷가 마을로 황급히 달려 갔다네

내려온 그날부터 도랑엔 시신이 없어 졌으니

지금까지 하늘이 어둑 하구나

이 일을 수행하라고 돈을 거두어들여

참으로 부끄럽게도 관청에다 내 공덕비를 세우다니

비바람이 백년을 갈아내도 끄떡 없겠군

빛나는 이 일을 사람들이 영원히 보고 듣도록

 

함안 총쇄록에 기록 되어있는 내용이다.

 

원문성에 관하여 <여지도서> 통제영 성지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원문 이층 누각은 문 좌우로 부터 바다에 이르기 까지 돌로 쌓았는데 성 왼쪽은 길이 151보,높이 13척 이며

성 오른쪽은 길이 202보 높이 13척이다.

통제영으로부터 10리 거리다.

 

함안 총쇄록에는 오횡묵 사적비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종종 걸음으로 걸어서 원문으로 들어가니 문안에 새롭게 만든 비석이 있었다.

통정대부함안군수전별향사오공횡묵영세불망비

 

두가지 사실을 확인하니 원문의 위치가 의심이 든다.

문안에서의 기준으로 왼쪽이면 애조원 쪽이며 짧은 거리(151보)다.오른쪽은 원문만이며 먼 거리(202보)이다.

또한 현재 발견된 위치의 오횡묵 비의 위치도 맞지 않는다.

이 비석이 원래 있었던 곳은 원문성 안이다.

 

오횡묵의 총쇄록을 보면 비석은 성문안에 세웠다고 한다.

그러면 현재의 발견된 비석이 옮긴게 아니면 우물터 앞의 원문성터는 아니라는 결론이나온다.

좀더 죽림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고 짐작된다.

오횡묵비,거제가는 길목,성내우물 등을 종합하면 이곳 어딘가에 성문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옛길을 추적하면 그 윤곽이 나온다

 

 

옛길은 농촌지도소 앞길과 통영향교 앞길로 연결된다.

 

통영의 입구에 있는 예술의 도시 통영 현판

 

향교앞에 11:30경 도착 했다.

통영 향교는

광무 4년(1900) 이 지역이 고성현에서 분리되어 진남군으로 독립하게 되자

이 고장 사림들이 지방민들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1901년 고성향교에서 분리하여 창건하였다.

 

일반 백성이 있던 마을이 부곡, 향, 소 가 있는데 이곳 죽림이 고려시대 죽림부곡이며

해피 데메 있는 해빙부곡 노산의 구허부곡 도선 부곡이 오래된 마을이다.

 

 

위로 올라가면 홀리골이며 조바우 마을이 조암 마을이다

 

등산나온 아지매들이 냉이 캐기에 여념이 없다.

 

신애원을 지나니 언덕위에 큰 산소가 있어 올라갔다.

위쪽에는 두기의 산소가 나란히 있으며 약간 아래쪽으로 한기의 산소가 있다.

 

비석에는 가선대부방답첨사신공 정부인밀양박씨 라고 쓰였으며 비석 뒷면에는 신기립이라는 이름이 있다.

당시의 직제에는 통제사(종2품)-수사(정3품)-첨사(종3품)-만호(정4품)라고 한다.

여기서 가선대부라함은 급수 즉 사무관 등을 이야기 한단다.

조선시대 종2품의 하계(下階) 문관의 관계(官階). 종 2품으로 문(文) 무반, 종친이 받았다.

 

비석의 뒷면이다.

위공 기립 자는 00 가족사항 공적 등등을 기록해 놓았다.

 

약간 아래쪽의 산소에는 의인(宜人)이라는 표현이 있어 의인은 남편이 큰 벼슬을 하면 부인에게 붙이는 명칭이라고 한다.

정부인이 아닌 벼슬이 있는 남편을 둔  부인의 묘소다.

 

수군 첨사 신기립의 묘소였다.

 

무인석.

 

이 조암마을을 가로질러 고개를 넘으면 주막촌이 나오는데 그곳이 현재는 교회다.

고속도로 아래 터널을 세개나 통과하니 토종닭을 키우는 농장이 나오는데 길이 끊어졌다.

 

고개를 넘을수 없어 할수없어 고속도로 출구쪽으로 나왔다.

고속도로를 걷고있는 일행

 

이곳 정자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 나의 신분을 물어서 아버지 존함을 대니 대부분 아신다.

특히 자개교실에서 같이 방송국에 출연하신 분은 더욱 잘 아시고 

그중 젊은분은 안면이 있었는데 어머님 병원에 계실때 병문안을 오신 분이다.

말 안듣는 세째아들이라고 하며 알아본다.

김밥의 반찬을 가방에 매고 왔는데 어깨가 너무 아파서 여기서 먹고가자고 했다.

김 관장님이 매실주와 커피까지 갖고 오셔서 맛있게 김밥을 먹고 13;20에 출발했다.

 

 

 국도변을 건너 노산마을로 들어와서 노산천변을 좌측으로두고 걸어올랐다.

약 5~60m 오르다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니 큰 이팝나무가 있다.

이팝나무에는 벌이 없다고 한다.

 

이팝나무와 일직선으로 느티나무가 여러그루 있다.

이쪽이 옛길같은 느낌이 든다.

 

나무 아래로 돌아서 다시 충혼교를 지나 광도천을 건너니 광도면장 홍근수 공덕비가 있다.

 

좀더가니 가락김씨 제실이 있다.

 

제실 안에있는 효열비

 

아래쪽의 길을 계속가니 통제사 비가 있다고 기억 한다.

언덕 위쪽에 통제사조공경 이라는 비석이 보인다.앞의 큰 상석이 있으며 그 뒤쪽에 짧게 세워져있다.

뭔가 정상적인 비석이 아닌것 같다.

 

조금더 위쪽에는 어떤 산소아래에 암행어사비가 있었다.

수의사도조공석여혈민비라고 쓰여있다.

수의라는 말은 비단옷을 입은 사람 즉 암행어사를 지칭하는거라고 한다.

조석여 암행어사가 백성을 위하여 노력을 했다는 뜻이겠지.

이것을 보니 이곳이 옛길임을 알겠다.

여러 사람이 볼수있도록 길옆에 세웠다.

 

상노산을 계속 오르니 최씨의 제각이 있다.그 뒤산의 큰 바위가 매바위 라고한다.

한퇴마을로 들어섰다.한퇴마을 길로 계속 올라가니 한퇴 콩나물 공장이있다.

 

조금더 오르니 논가운데 지석묘가 한기가 있다.이곳도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이다.

 

계속 오르니 오늘은 관덕 저수지위  통제사비석 까지만 가자고 하신다.

관덕저수지를 지나서 한퇴골 관광농원이 있으며 백우사 라는 절이 신축되고 있었다.

 

좀더 오르니 백우정사라는 절의 표시가 있으며 그 갈림길에 무자비와 좌측 언덕위에 통제사 구현겸의 비가 있다.

 

언덕위쪽에 있는 큰바위에 있는 석비는

통제사구공현겸

세세유택세세불망

일영군민각

이라 쓰여있다.

이곳도 시에 건의하여 문화재로 보호 받도록 관리를 해야 할 것이다.

 

무자비는 관장님이 예전에 사진을 찍어 놓은게 있다고 기억한다.그때는 분명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 절에서 혹시 파버린것은 아닌지 여러 추측들을 한다.

이곳에다 불상을 멋지게 암각하면 좋지 않겠나 등등...

 

한치를 넘으면 원동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에 고려시대 큰 벼슬을 한 연안김씨 공덕비가 있다고 하니

관장님이 세병관을 세운 내력을 이야기 한다.

1604년 세병관의 기둥을 세우면 자고나면 넘어지고 자고나면 넘어지고 하여 이상하다 생각 했는데

통제사 꿈에 허연 영감이 나와서 왜 남의 땅에다 세병관을 세우느냐 했다고 한다.

이후 우후에게 물어보니 당시에 무덤이 있었는데 그 무덤을 파서 세병관 앞에 방치하여서 다시 북산(여황산)에 묻어주었는데

이장을 해간 곳이 원산리다.그래서 이곳 원동마을의 연안김씨의 시조묘가 당세 세병관이 있던 명당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고성 남산에도 통제사 관련 비석이 3기나 있다고 한다.

오산마을을 지나면 홍류동 계곡이 있다고 한다.

경치가 좋은곳은 홍류동 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다.

오늘 오신분들 중에 문화원 사무국장이 제일 젊은데 나보다 7살 떨어지니 50세이다.

오늘 오신분들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향토사 연구소장님은 김일룡 소장님이시고 항남동에서 수향초밥집을 20여년간 경영 하신다고 한다.

강기재 이사님은 도다리 쑥국을 지으신 전 농협 전무를 역임 하신분이며 조철곤 이사님은 전임 교장선생님이고

현재는 한산면지 주필이시다.

김건식 이사님은 지난번 아버지와 같이 통영자개로 kbs에 출연하신 분으로 전 수협 전무를 하신 분이다.

김순효님은 현재 문화원 감사를 맏고 있으며 전임 요트학교 교장이었으며 로타리 클럽 회장을 하면서

하양지에 정자를 지어 주어서 아버지와 교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성완님은 통영 문화원 향토사 연구원이며 문화원 사무국장을 맡고있으며 성포 윤복구씨가 작은 외할아버지라고 한다.

윤경석,호근이가 외삼촌이며 어릴때는 성포에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다음주 목요일 9시 30분에 다시 모여 한치를 넘기로 하고 버스를 타고 왔다.  

 

2012.3.8 한치 에서 백세청풍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