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조사(慧遠祖師)
진(晉)나라 혜원(慧遠)은 안문(雁門)누번(樓煩)사람이라
널리 육경(六經)에 해박(該博)함이나 더욱 장노(莊老)
<장자(莊者)노자(老子)>에 밝았다.
도안법사(道安法師)에게서 반야경(般若經) 강의(講義)를
듣고 활연(豁然)이 대오(大悟)함이라.
이를 인(因)하여 머리를 체발(剃髮)하고 염의(染衣)를 입고
스님이 되어 그를섬겼다.
태원(太元) 육년(六年)심양(潯陽)을 지나다가
여산(廬山)이 한광(閒曠)하여 가(可)이 마음이 깃들어
휴식(休息)할 만한곳임을 알게되었다.
『여산(廬山)이 유적(幽寂)하여 마음을 깃들여 살만한
곳임을 보게되었다』
마침내 드디어 산신(山神)이 현몽(現夢)함을 감응(感應)
하고 어느날 하루저녁에 뇌우(雷雨)<번개와비바람>가
휘몰아치더니 임목(林木)이<목재(木材)> 스스로 이르러옴
에 힘들이지않고 구(求)할수 있었다.
자사(刺史) 환이(桓伊)가 이에 사찰을 건립(建立)하여
만들고 신운(神運)이라고불렀다.
혜영(慧永)이 먼저 서림(西林)에 머물러 주지(住持) 하였
음으로하여 혜원(慧遠)이 사는곳은 동림(東林)이라
하였다.
혜원조사(慧遠祖師)가 동림(東林)에 거주(居住)하여 머문
지 사십년(四十年)동안 자취(自趣)를 속세(俗世)에 들여
놓은적이없이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만 뜻을두어
고승(高僧)과 거유(鉅儒) 일백사십(一百四十)사람과 함께
청정(淸淨)한 연사(蓮社)을만들었다.
연루(蓮漏) 6시간(時間)동안 선송(禪誦)을 그치지 않았고
마음과 생각을 정토(淨土)에 쏟아부어 세번이나 성상
(聖相)을 보았으나 침묵(沈黙)하고 남에게 누설(漏泄)하지
않음이라.
훗날 19년(394)7월 저녁 반야대(般若臺)에서 정(定)에서
막일어 나려고 하다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몸이 허공
(虛空)에 가득한데 원광(圓光)속에서 화신(化身)부처님
이 몸을 나투시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
(大勢至菩薩) 두명의 보살(菩薩)이 좌우(左右)에서 모시고
서있는 모습(模襲)을 보았다.
또한 물이 흐르는듯 광명(光明)이 열네줄기로 분산(分散)
하면서 아래위를 선회(旋回)하는 속에서 미묘(微妙)한
법(法)을 연설(演說)하시고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
『내가 나의 본원력(本願力)을 지키기 위하여와서 너를
안위(安慰)하노라 너는 칠일(七日)후(後)에 반드시 나의
국토(國土)에 태어나리라』
또보니 불타야사(佛陀耶舍) 혜지(慧持) 혜영(慧永) 유유민
(劉遺民)등(等)이 부처님의곁에서 읍(揖)하며 스님께서는
저희들보다 뜻을 세운지가 오래였습니다.
어찌하여 오시는것이 이다지 늦습니까하는것이었다.
이미 때가 이르러온것을 알고는 문인(門人)들에게 말하기
를 내가 처음 이곳에 머물는때에 세 번 성상(聖相)을
보았고 오늘다시 두 번이나 친견(親見)하였다.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것을
의심(疑心)할수없는일이다.
하고는 때가 이르자 단정(端正)히 앉아 입적(入寂)하였다
때는 의희(義熙)12년(年)(416)8월(月)6일(日)이었다.
찬(讚)하여말한다 진(晉)나라 이전(以前)에도 비록 정토
(淨土)의 법(法)이 비록 중국(中國)에 전(傳)해지긴했으나
널리 전(傳)하고 힘써 행(行)하여 거리나 집집마다 정토
(淨土)의 법(法)을 깨우치게된것은 혜원법사(慧遠法師)로
부터 비롯되었다.
그래서 만대(萬代)이후(以後)에 정업(淨業)을 수행(修行)
하는 제자(弟子)들이 스님의 거룩한 뜻을 추존(推尊)하여
시조(始祖)로 삼게된것이다.
참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다시 서방정토
(西方淨土)을 연설(演說)한것이며 아미타(阿彌陀)부처님
이 동토(東土)에 현신(現身)한것이라 할만하였다.
그 공(功)이 위대(偉大)하지않는가 내가 예전(預前)에 여산
(廬山)을 여행(旅行)하다가 호계(虎谿)의 샘을마셔보고
삼소(三笑)의 집을 바라보면서 18현인(賢人)의 유적(遺蹟)
을 배회(徘徊)한적이있었다.
그 규모(規模)가 홍원(弘遠)한것을보니
족(足)히 만(萬)명의 스님들이 살만한곳 이었음을 알수
있었다.
그러니 전각(殿閣)은 먼지가 쌓였고 종(鐘)과 북은 적막
(寂寞)에 뭍혔으며 문(門)은 뒤틀리고 부엌에는 냉기(氣)가
감돌았다.
철인(哲人)이 가시자 아름다운 자취(自趣)도 끊어지고만
것이다 애달픈일이었다.
- 왕생집(주굉 연지대사) -
여기는 불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