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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새삼 山과 인생을 생각한다

청산(푸른 산) 2014. 8. 20. 03:16

 

달포 전, 어느 모임에서 「山과 인생」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게 됐다. 마침 장소가 도봉산 밑이어서 오랜만에 산에 갔는데,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해 본 지도 오래다.

우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모두 옷차림이 제법이었고, 누구나 등산 지팡이를, 그것도 두 개씩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없던 모습이다. 산은 낮아도 산길에서 필요한 장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지팡이를 뭐라고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등산은 일종의 스포츠이면서 일반스포츠와 크게 다르다. 그저 활동 무대가 산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쓰이는 장비와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용어가 다르다. 등산 세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 세계에는 역사가 있고 등산책들이 있다. 산을 좋아하고 멋지게 차려입은 그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나는 이날 「산과 인생」이라는 주제로 무슨 이야기부터 할 것인가 생각하며 산길을 갔다. 눈앞에 다가서는 도봉산의 선인과 만장 그리고 자운봉이 유난히 내 눈을 끌었다. 언제 보아도 명봉이다. 헤르만 불의 고향 인스부르크의 카르벤델 산군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이런 멋진 산이 우리 생활권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날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은 듯했다. 수도 서울을 둘러싼 산 이야기다. 이런 데가 전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 유명한 프랑스의 파리, 영국의 런던, 이탈리아의 로마, 가까운 일본의 도쿄, 태평양 건너 뉴욕, 로스앤젤레스… 그 어디에 산이 있는가.

서울은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그리고 큰 강을 사이에 두고 관악산에 둘러 싸여 있다. 높이야 800미터에서 600미터정도니 이를테면 야산이나 다름없다.

서양에서는 산으로 여기지 않을는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큰 도시 주변에 그런 산이 도대체 없다. 도시와 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원주의 치악, 대구의 팔공, 광주의 무등은 모두가 1200미터나 된다.
나는 특히 우리나라 본토 남단에 있는 부산의 금정산(802m)을 잊지 못한다. 1984년 정월 초하루, 그곳을 떠나 76일 동안 태백산맥을 종주한 사람이 있었다. 남난희라는 여성 산악인인데, 그녀는 그리고 <하얀 능선에 서면>이라는 책까지 냈다. 한마디로 놀라운 일이었다. 엄동설한, 아무도 간 사람 없는 길을 여자의 몸으로 혼자 갔다. 새로운 발상,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산에는 자유가 있다. 그래서 누구나 간다. 발상의 자유, 행동의 자유… 그 세계는 무한하다. 나는 산에 가는 사람을 보면 친밀감부터 느낀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다. 높은 관직이나 대기업과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위복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굳이 조사한 것도 아니나 거의 틀림없지 않을까.

나는 언제나 자문자답 한다. 산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우리는 왜 산에 가는가. 그것은 철학에서 말하는 아포리아(Aporia)와도 같다. 물어도 물어도 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 답 없는 문제를 안고 묵묵히 산에 가는 것이 우리들 산악인이다.

나는 옆을 스쳐가는 많은 등산객들이 저마다 어떻게 산과 만났는지 궁금했다. 그토록 좋아하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산을 오르내리는지 알고 싶었다. 백운대 밑에 살며 백운대를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그토록 산과의 만남에는 숙명적인 면이 있다. 산천초목이 좋아서 산에 가는 것과는 다른 것이 산과의 만남이다.

등산은 하루의 나들이고, 며칠의 외출이며, 때로는 몇 달씩 산에서 지낸다. 등산은 의식주의 이동이라 하는가 하면,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이라고 한 사람도 있다. 히말라야 자이언트의 하나인 마칼루를 초등한 장 프랑코 대장은 등산이 탈출이며 때로는 종교라고 했다. 정신적 고양, 생과 사의 대결이 등산이니 그런 말도 나옴직하다. 생각할수록 심오한 세계가 등산이다.

등산에는 역사가 있다. 문화사가 아니라 도전사다. 등산의 역사는 산과 만난 사람의 남다른 궤적의 기록이며, 그들은 그것을 책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 책들은 철학자의 저서와 다르다. 철학은 이론이나 등산책은 실제며, 그 실제는 언제나 죽음과의 대결이다. 헤르만 불, 리오넬 테레이, 발터 보나티는 그들 중에서도 유난히 돋보이는 세계 산악계의 거인들이다.

이날 강연회에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모처럼 즐거운 하루산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진하고 소박한 소시민들에게 깊이 있는 등산 세계이야기는 그들의 관심 밖의 이야기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즐거운 하루의 산행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등산은 산과의 만남이면서 산사람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산 친구, 파트너십, 자일샤프트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나는 오랜 세월 산을 중심으로 살아오면서 근자에 이런 산악인과 만났다. 그는 지난날 박봉 생활에서 석 달이나 휴가를 얻어, 알프스 4000미터급 봉우리를 열 개나 올랐다. 그것도 그저 오르내리지 않고 그 봉우리에 일찍이 도전한 선구자들을 생각하며 올랐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머메리가 도전하며 남긴 그 유명한 "inaccessible by fair means(그대로는 오를 수 없다)"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얼마 전 일본 TV에서 1921년 아이거 동산릉을 초등한 등산가 이야기를 듣고, 그의 산행기가 보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산악인도 있는가 하고 나는 새삼 놀랐는데, 그 책이 마침내 내게 있어, 나는 바로 그 산행기를 옮겨 그에게 주었다.

등산은 끝없는 지식욕과 탐구욕과 정복욕의 소산이라고 프랑스 등산가 샤텔리우스가 그의 책 <알피니즘>에서 말했다. 그래서 오늘날 지구상에는 더 오를 데가 없어지고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서울 주변의 산이 이토록 등산객으로 붐비고, 거리에 장비점이 화려하며, 멋진 등산 잡지가 우리 눈을 자극하는 까닭이다.「산과 인생」은 생각할수록 멋진 테마다. 그날 산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모두가 「산과 인생」의 멋진 세계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하루가 있었다. 산과 인생 사이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산의 자유가 모체다. 서양 등산책 여기저기에 나오는 "The freedom of the hills"다. 그 자유란 어떤 것일까. 역사적 마터호른 초등을 해낸 에드워드 윔퍼는 하나의 삽화 화공이었으며, <설과 암> <별과 눈보라> 등 불멸의 고전을 남긴 가스통 레뷔파는 산이 없는 지중해안 도시에서 태어났다. 세계대전으로 황폐한 독일의 슈미트 형제는 그 가난 속에 낡은 자전거로 멀리 스위스로 달려가 마터호른 북벽을 초등했다.

세계 등반사를 기록한 위대한 등반은 모두가 역경과의 싸움이고 한계 도전이었다. 스폰서가 뒤에 있고 매스컴이 따라 붙으며, 집에 앉아 원정길의 로지스틱(logistics) 문제를 해결하는 오늘의 등산 사정과는 세계가 다르다. 등산이 무상의 행위라는 리오넬 테레이의 유명한 말이 있지만, 우리는 그 말의 진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테레이야 말로 당대에 보기 드문 철두철미한 고전적 알피니스트였다. 그는 끝내 산에서 가고, 지금은 프랑스 샤모니 산악인 묘소에 에드워드 윔퍼와 나란히 누워있다. 오늘날 알프스를 찾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윔퍼와 테레이가 여기 있는 까닭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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