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에는 두 손을 뒤로 돌려 묶인 한 노인죄수가 푸에르토리코 국립 미술관의 현관에 걸려 있다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제목의 윗 그림에 대한 감동적인 해설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림에 숨은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야 하듯이 일상사에서도 교만과 아집, 편견을 버리고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매우 교육적이고 일면 논리 정연한 내용이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가 어떤 곳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국립" 미술관이란 표현에 좀 이상스러움을 느꼈을 수도 있었으리라. 게다가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에서 그려졌다는 그림이 현대적이기는 커녕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 풍을 빼닮아야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 진상을 추적해 본다. 여기서 우선, 감옥에 갇혀 굶어죽게 된 아버지를 딸이 자기 젖을 먹여 살려 내었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맞는 이야기임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문제는 이 감동적인 얘기의 무대가 푸에르토리코가 아니라는데 있다. 이 이야기는 유감스럽게도 고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30년 경, 발레리우스 막시무스(Valerius Maximus)가 수사학 교재로 쓴 Facta et dicta memorabilia (기억할만한 공언과 격언에 관한 9권의 책)에 실려있는 인간의 덕목과 악의 본보기에 대해서 기술해 놓은 내용 중 일부분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Cimon, 아버지에게 젖을 먹인 딸의 이름은 Pero라고 한다. 딸의 이 숭고한 행동에 감동한 당국은 결국 아버지를 석방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을 Caritas Romana 라고 부르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벽화로도 그려질 정도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이 주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인간의 육체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던 르네상스 시대부터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그림이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연스러운 애정행각을 그린 3류 포르노 작품이 아닌 것은 이제 분명해진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관심" 에서 보듯, 이런 그림이 어느 정도의 에로틱한 면을 포함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니 이 그림을 보고서 에로틱한 상상을 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Caritas Romana를 보면서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투사라는 식의 황당한 '이념 과잉'의 왜곡된 해설이야 말로 더 큰 잘못이 아닐까. 따라서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진다." 라는 교훈은 이제 푸에르토리코의 국립 미술관 운운하는 엉터리 해설에 되돌려 주어야 할 것 같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벨기에의 동화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플랑드르(Flandre)의 화가 루벤스라고 한다. 이 작품이 바로 "시몬과 페로(Cimon and Pero)"라는 로마시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써 윗 그림은 1612년에, 그리고 아랫 그림은 1630년에 그린 것이다. 더군다나 이 그림은 현재 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이 아니라 네델란드 암스텔담의 왕립박물관인 라이크스 뮤지움(Rijks museum)에 걸려있다. 진실된 이미지보다 더욱 진실처럼 들리는 이 조작된 이미지에 더 이상 흥분하고 조롱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참고 문헌 The Female Breast as a Source of Charity: Artistic Depictions of Caritas Romana Caritas Romana는 "로마의 감동" 혹은 "로마의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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