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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모음(2)

청산(푸른 산) 2012. 5. 25. 22:54
★청산인

아름다운 추억 이 세상에 나 혼자 뿐 엉망인 외톨이라고 생각했을 때, 너는 두 손을 꼭 잡아주며 우정이라는 약속을 지켜주었다. 친구야! 그땐 부모보다도 네가 더 고마웠지. 모든 것이 무너진 곳에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고 하나 하나 새롭게 시작해주었다. 그 때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떨까? 그 때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떨까? 자꾸만 자꾸만 달아나고만 싶던 그 날 나와 함께 한없이 걸어주며 내 가슴에 우정을 따뜻하게 수 놓았지 그 날 너는 나의 가슴에 날아온 천사였다. 나의 친구야! 아름다운 추억의 주인공은 바로 너였구나.


★청산인

꽃잎 인연 몸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청산인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피었던 꽃이 어느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 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 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 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청산인

저무는 꽃잎 가장 화려하게 피었을 때 그리하여 이제는 저무는 일만 남았을 때 추하지 않게 지는 일을 준비하는 꽃은 오히려 고요하다 화려한 빛깔과 향기를 다만 며칠이라도 더 붙들어두기 위해 조바심이 나서 머리채를 흔드는 꽃들도 많지만 아름다움 조금씩 저무는 날들이 생에 있어서는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아름다운 날에 대한 욕심 접는 만큼 꽃맺이 한치씩 커오른다는 걸 아는 꽃들의 자태는 세월 앞에 오히려 담백하다 떨어진 꽃잎 하나 가만히 볼에 대어보는 봄날 오후


★청산인

여린 가지 가장 여린 가지가 가장 푸르다 둥치가 굵어지면 나무껍질은 딱딱해진다 몸집이 커질수록 움직임은 둔해지고 줄기는 나날이 경직되어가는데 허공을 향해 제 스스로 뻗을 곳을 찾아야 하는 줄기 맨 끝 가지들은 한겨울에도 푸르다 모든 나무들이 자정에서 새벽까지 견디느라 눈비 품은 잿빛 하늘처럼 점점 어두운 얼굴로 변해가도 북풍 어두운 살아 움직이는 가지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엄동에도 초록이다 해마다 꽃망울은 그 가지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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