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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모음(1)

청산(푸른 산) 2012. 5. 25. 15:38
★청인산

깊은 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들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의 여울은......


★청인산

희망 그대 때문에 사는데 그대를 떠나라 한다 별이 별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내게 오는 그대를 꽃이꽃에 닿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대를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고 사람들은 내게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돌아섰듯이 알맞은 시기에 그대를 떠나라 한다 그대가 있어서 소리없는 기쁨이 어둠속 촛불처럼 수십개의 눈을 뜨고 손 흔드는데 차디찬 겨울 감옥 마룻장 같은 세상에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온 한장의 얇은 모포 같은 그대가 있어서 아직도 그대에게 쓰는 편지 멈추지 않는데 아직도 내가 그대 곁을 맴도는 것은 세상을 너무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 사람 사는 동네와 그 두터운 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모든 아궁이가 스스로 불씨를 꺼버린 방에 앉아 재마저 식은 질화로를 끌어안고 따뜻한 온돌을 추억하는 일이라 한다 매일 만난다 해도 다 못 만나는 그대를 생애 오직 한번만 만나도 만나는 그대를


★청인산

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잇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청인산

그대 떠나고 난 뒤 눈발이 길어서 그 겨울 다 가도록 외로웠지만 그대가 곁에 있던 가을 햇볕 속에서도 나는 내내 외로웠다 그대가 그대 몫의 파도를 따라 파도 속 작은 물방울로 수평선 너머 사라져간 뒤에도 하늘 올려다보며 눈물 감추었지만 그대가 내 발목을 감으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무렬이었을 때도 실은 돌아서서 몰래 아파하곤 했다 그대도 눈치채지 못하고 나도 어쩌지 못한 다만 내 외로움 내 외로움 때문에 나는 슬펐다 그대 떠나고 난 뒤 가을 겨울 봄 다 가도록 외로웠지만 그대 곁에 있던 날들도 내 속에서 나를 떠나지 않는 외로움으로 나는 슬펐다


★청인산

아름다운 추억 이 세상에 나 혼자 뿐 엉망인 외톨이라고 생각했을 때, 너는 두 손을 꼭 잡아주며 우정이라는 약속을 지켜주었다. 친구야! 그땐 부모보다도 네가 더 고마웠지. 모든 것이 무너진 곳에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고 하나 하나 새롭게 시작해주었다. 그 때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떨까? 그 때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떨까? 자꾸만 자꾸만 달아나고만 싶던 그 날 나와 함께 한없이 걸어주며 내 가슴에 우정을 따뜻하게 수 놓았지 그 날 너는 나의 가슴에 날아온 천사였다. 나의 친구야! 아름다운 추억의 주인공은 바로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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