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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가락지

청산(푸른 산) 2011. 5. 1. 19:42


    여왕의 가락지 선덕여왕은 관음보살 같은 용모를 지닌 왕이었다. 아무리 천민의 뜻이라 하더라도 늘 귀를 기울여 주었고 자비를 넉넉히 베풀었다. 뿐만 아니었다. 여왕은 자비뿐만 아니라 빼어난 지혜로써 남자 신하와 우락부락 하고 힘센 장수들을 굴복시키곤 하였다. 한번은 당나라 태종이 여왕에게 홍색·자색·백색으로 그린 모란 꽃의 그림과 그 씨를 한 줌씩 보내왔다. 여왕은 신하들과 함께 그 그림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꽃은, 꽃은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겠구나.” “여왕님, 향기가 없는 꽃도 있사옵니까?” “두고 보면 알 것이니라. 즉시 이 씨를 뜰에 뿌려 보아라.” 왕명에 의해 당나라에서 온 씨앗은 즉시 후원에 뿌려졌다. 그날부터 신하들은 크게 두 패로 갈라져 수군거렸다. 여왕을 깔보던 장수들은 향기 없는 꽃이 어디 있느냐며 떠들었고, 여왕의 자비와 지혜를 믿던 신하들은 어서 향기 없는 꽃이 피어서 무례한 신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기를 바랐다. 씨를 뿌린 지 두어 달, 드디어 백색의 모란꽃부터 먼저 그 봉오리 를 터뜨렸다. 말할 것도 없이 장수들의 얼굴은 모란꽃처럼 하얗게 변했다. 여왕의 예언대로 향기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주색의 모란꽃도 역시며칠 후에 피어났지만 향기가 없었다. 장수들은 이번에도 자주빛깔의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럴 수가!” 반면에 여왕의 지혜를 따르던 신하와 궁녀들은 환성을 질렀다. “여왕님의 지혜를 당할 자는 아무도 없다!” 세번째로 피어난 붉은 빛깔의 모란꽃도 역시 향기가 없었다. 이제, 여왕이라고 해서 터무니없이 질투하고 깔보던 신하와 장수들은 부끄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마지막으로 피어난 모란꽃처럼 얼굴을 붉혔다. 또 여왕에게 이런 보고가 올라온 일도 있었다. “여왕님, 영묘사 옥문지에 많은 개구리들이 모여서 삼일 동안 울고 있다고 하옵니다. 겨울에 개구리가 나타난 것만도 변고인데 삼일 동안이나 울고 있 다니 불길한 징조가 아닌지요?” “그렇다. 백제군이 쳐들어 왔다는 뜻이다. 그러니 잘 훈련된 병사 2천 명을 서교(西郊)의 여근곡(女根谷) 으로 보내 숨어 있는 적을 무찌르도록 하라.” 여왕의 예언은 이번에도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두 장수가 병사 천 명씩을 데리고 여근곡을 찾아갔을 때 과연 거기에는 백제군의 병사 5백 명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신라군은 힘들이지 않고 백제 장수와 병사들을 쳐부수 었고, 뒤따라 오는 천삼백 명의 백제군까지 생포 또는 사살 하였다. 놀란 장수들이 예언의 비결을 묻자 여왕은 그들의 무지 를 이렇게 깨우쳐주었다.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즉 여근(女根) 이니 여자는 음(陰)이요, 그 빛이 희고 또 흰 것은 서쪽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지.” “정말 놀라울 뿐이옵니다. 여왕님의 성지(聖智)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옵니다.” 이러한 소문은 곧 궁궐 밖으로 퍼졌다. 그리하여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선남선녀들은 더욱 가슴을 설레었다. 그 중에서 지귀라는 총각은 아주 심했다. 첨성대를 완공하던 날, 기념법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멀리서나마 여왕을 보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지귀는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다. 지귀는 날마다 잠을 못 이루며 바짝바짝 야위어 갔다. 영문을 모르는 그의 부모는 지귀에게 몹쓸 병마가 붙은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래서 영험하다는 온갖 약초를 다 구해다가 달여 먹였다. “이 약을 먹어라. 좀 나을 게다.” 그러나 그 어떤 약도 효험이 없었다. 이제는 몸만 야위어가는 것이 아니라 열까지 올랐다. 어떤 날은 온몸에 열꽃이 돋았고 또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도 하였다.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지귀의 어머니는 지귀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 을 알아내었다. 지귀가 열에 시달리며 내지르던 헛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아니, 저놈이…… 지 분수를 모르고.” 지귀 어머니는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왕을 사모하다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지귀 어머니는 아들을 그대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불덩어리가 담긴 양 자기 가슴을 끌어안고 뒹구는 아들이 가련하고 딱하기만 하였다. 그렇다고 어찌해볼 방도도 없었다. “여보, 어찌했으면 좋겠소?” “방법이 딱 한 가지 있긴 있소만.” “방법이 있다니요? 어서 들어 봅시다. 어서.” “영묘사 법회에 여왕님이 오신다고 그래요. 그러니 그때 주지스님께 부탁하여 여왕님을 만나게 해줍시다.” “대신들이 반대하며 막지 않을까요?” “어쨌든 이제는 그렇게라도 해야지 별 도리가 없지 않소.” 지귀의 부모는 서로 그렇게 약속을 한 뒤, 영묘사의 대법회날을 기다렸다. 물론, 영묘사를 몇 번이나 찾아가 주지스님에게 겨우 허락을 받아 놓은 뒤였다. “여보, 여왕님이 우리 지귀를 보고 짜증이나 내지 않을까요?” “불길한 소리는 그만 합시다.” 이윽고 영묘사 대법회날이 왔다. 사람들이 여왕을 보기 위해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지귀네 식구도 겨우겨우 법당 앞에 있는 목탑의 한 모퉁이에 자리 를 잡았다. 지귀는 가슴이 쿵쿵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주지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탑 쪽으로 걸어오는 여왕을 보자 그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사실 그랬다. 지귀는 여왕과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기절하고 말았다. “아니, 저 쓰러진 젊은이는 누구인지요?” “임금님을 한 번 뵙겠다고 한 지귀라는 청년이옵니다.” 주지스님의 대답을 듣고 난 여왕은 자비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오, 가엾은지고, 내 이 가락지를 하사하리다.” 그러자, 믿기지 않는 정경이 벌어졌다. 여왕이 지귀의 가슴에 가락지를 놓자마자 기절해 있던 지귀가 벌떡 일어나 목탑을 향해서 불길을 뿜어대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귀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여왕을 사모하던 열병의 덩어리였다. 주지스님은 지귀의 무례함에 허둥지둥 당황하였다. 경건하고 엄숙해야 할 대법회날 영묘사가 자랑하던 목탑이 타버 렸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귀를 소개한 자신에게 벌이 내려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러나 여왕은 오히려 주지스님을 위로하였다. “스님, 너무 걱정마오. 저 탑이 중요하오, 저 지귀라는 청년이 더 중요하오. 탑이야 다시 불사를 일으켜 쌓으면 그만 아니오. 그러니 너무 걱정마시오.” 여왕의 이 말에 영묘사에 모였던 수많은 대중이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그 어떤 법문보다도 영묘사에 모인 대중들을 감복케 하였던 것이다. 어느새 지귀의 눈에는 이슬 같은 것이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빛은 건장한 청년의 그것으로 바뀌어 갔다. - 불교설화(佛敎說話) -


여기는 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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