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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朴을 다시 생각한다

청산(푸른 산) 2010. 10. 30. 17:00

로버트 朴을 다시 생각한다

 

 

-돌부처도 입을 열게 하는 북한의 미인계와 성고문-

로버트 박의 북한 주민의 인권을 위해 살겠다고 한 소신 앞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이현오   

 

 "북한에서 받은 상처와 흉터는 너무 깊어 극복이 힘들 정도다. 그 후유증으로 나는 개인적인 의욕을 잃어버렸다. 앞으로 결혼도 못하고 성관계도 맺지 못할거 같다. 북한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귀국 직후 자살을 시도 했고 7개월 넘게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어느 탈북자의 고백이 아니다. 지난해 크리마스 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동토(凍土)의 땅 북한에 자유와 복음을 전하고자 독재자 김정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휴대하고 들어갔다 북한 당국에 억류돼 모진 고문과 굴욕적 학대, 성 고문을 받고 43일만에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박(29세, 한국명 박동훈)이 한 말이다.
 
  26일 저녁 뉴스를 시청하다 로버트 박의 인터뷰를 지켜보던 기자는 본능적으로 취재수첩을 집어 들었지만 짧은 순간 이어지는 인터뷰 내용에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비록 세대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분단된 조국을 두고 동시대에 겪는 한민족으로서의 아픔과 더불어 같은 남자로서 앞으로 겪어야 할 그의 인간적 고뇌와 고통을 동시에 떠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수 지배계층을 제외하고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상실하고 헤아릴 수 없는 인권 유린 속에 오직 권력층에 대한 충성만을 강요당하는 북한 동포들에게 새 희망을 전하겠다는 숭고한 인간애로 두만강을 건넜던 그에게 다가온 시련은 가히 자유민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충격이고 만행이었을 것이다.
 
  북한 체류 43일. 그에게 자행되었을 저들의 악행(惡行)은 그저 상상 속에 그려질 뿐이다. 그리고 북한을 떠나 2월6일 중국 북경의 서우두 공항에서 처음 TV 화면에 비친 퀭한 눈망울에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모습에 언론이 경악했고, 기자 또한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향한 후 그의 무사함과 북녘에 자유의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원하면서 1월12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대한민국 통일과 북한동포의 학살을 끝내기 위한 '로버트 박의 풍선'」날리기 행사가 개최되고, 현장을 취재하면서 염원하는 바가 더욱 간절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날 임진각 주변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세찬 바람에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손발도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날 임진각에서 북으로 보내는 대형 풍선의 줄을 잡고 있던 로버트 박의 여자친구인 미국인 여성도 그의 건강과 무사함을 간절하게 염원했다. 그리고 입북 43일만에 다시 자유의 품으로 안겼다.
 
  하지만 어제(10.26) 그의 몸과 마음, 눈빛은 예전의 로버트 박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북한 동포들이 겪어야 했고, 현재도 겪고 있는 그들의 피맺힌 절규와 아픔을 온몸으로 체득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귀국하고 난 뒤 로버트 박이 작성했다는 '반성문'이 북한 당국에 의해 공개됐을 때 주변에서는 비난의 움직임도 일었다. "그러면 그렇지, 매 앞에 장사 있어? 그럴 여면서 왜 가?"하는 코웃음이었다. 그는 분노했다. 완전히 날조된 것임을 확인했음이다.
 
  로버트 박은 선교사다. 무모하게 맹목적으로 간 게 아닌 것이다. "북한 주민의 빼앗긴 인권에 동족으로서의 아픔을 늘 함께 해왔다"고 그를 잘 아는 조성래 '팍스 코리아나' 대표가 밝히기도 했다.
 
  공산독재 정권 60년이 흐르면서 이념적으로 회의를 느끼거나 폭압 정권을 견디지 못하고, 배고픔을 참지 못해 탈북 한 동포가 2만여명을 헤아리고 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북한 학정을 폭로하고 20만 강제노동수용소 실상을 폭로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의 신경은 무반응에 무 대책이다. 북한인권법은 국회 상임위의 깊은 수렁 속에 빠진 채 오수(午睡)에 잠긴지 오래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 국제외교안보포럼에 참석한 미국의 북한인권운동가 수잔 숄티(Suzanne Scholte) 디펜스포럼 회장은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는 지금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과 비극을 안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북이 열렸을 때 그 참상들을. 그리고 우리는 북한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받고 어려울 때 왜 당신들은 우리를 돕지 않고 등을 돌렸는가 하고 말이지요."
 
  26일 KBS 카메라 앞에선 로버트 박은 분명하게 밝혔다. "북한 권력자들은 주민들을 어떻게 하면 죽일지, 굶게 할지, 노예로 부릴지, 통제할지 만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돕고 북한 주민의 인권을 위해 살겠다" 라고.
 
  기자는 북한주민들의 고통받는 삶에 죄스럽고, 탈북자들의 호소에 무 반응하는 우리사회의 냉혹함에 절망하고, 이국인(異國人)이면서도 한국인보다 더 앞장서 북한인권문제를 호소하는 수잔 숄티 여사의 북한 동포 생각에 가슴 먹먹하고, 로버트 박의 북한 주민의 인권을 위해 살겠다고 한 소신 앞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 2010-10-27, 18:28 ]

 

 

로버트 박 "北서 모욕스런 性고문 당했다"
“김정일 정권 붕괴돕고 북한 주민 인권위해 살겠다”
코나스   

 

지난해 12월 북한에 들어갔다 억류돼 43일 만에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박(28세)이 26일 KBS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인터뷰에서 "북한 권력자들은 주민들을 어떻게 하면 죽일지, 굶게 할지, 노예로 부릴지, 통제할지만 생각한다"며 "나는 앞으로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돕고 북한 주민의 인권을 위해 살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25일 죽을 각오를 하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지만 체포되자마자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구타와 폭력에 시달렸다. 아직도 그 상처와 흉터가 낫지 않는다"면서 풀려나기 전 억류 생활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북한이 모욕스런 성(性)고문을 했다"고 밝혔다.
 
 북한에서의 모진 폭행과 성적 고문 후유증으로 그는 (미국으로) 귀국 직후 자살을 시도했고 7개월 넘게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북한에서 받은 상처와 흉터는 너무 깊어 극복이 힘들 정도"라며 "그 후유증으로 나는 개인적인 의욕을 잃어버렸다. 앞으로 결혼도 못하고 성관계도 맺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로버트 박은 또 북한이 공개한 자신의 '반성문'은 날조된 것이라며 분노했다. 그는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북한 주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북한에 들어갔다"며 "나의 희생을 통해 사람들이 뭉쳐서 북한을 자유화시키기를 희망했다"고 말했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 2010-10-27, 13:56 ]

 

 

돌부처도 입을 열게 하는 북한의 미인계와 성고문

햇볕정책으로 남북민간교류가 활성화되면서 통전부의 미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극대화 됐다.

장진성   
 

 

로버트 박! 그가 자유와 인권을 외치며 북한으로 들어갈 때의 기상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때는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는 철부지의 오기로 평가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전율을 느꼈고 그래서 그는 이미 순교했다고 찬사의 시를 썼다.

 

북한의 미인계와 성고문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세계 최고일 것이다. 북한의 포섭공작 중 가장 첫 번째가 미인계이다. 성고문은 미인계가 통하지 않을 때 수치감과 모멸감에 스스로 구속되도록 약물과 함께 쓰는 최후의 강제수단이다.

 

북한에는 중학교를 갓 졸업한 16살 나이들로 김정일의 “3천 궁녀”를 뽑는 당조직부 5과란 것이 있다. 1차적으로는 김정일 초대소나 특각 궁녀로 선발되고 거기에서 밀려난 2부류는 대남공작부서 요원들로 선발된다. 그 외 여자들은 당, 군, 외무성 산하 초대소나 총무부 서기실 직원으로 입직된다.

 

그만큼 당 대남공작부서들인 당작전부, 대외연락부, 35호실, 통전부의 여성요원들은 미모도 미모지만 16살부터 훈련이 잘 돼 있다. 북한은 이 미인계로 남한은 물론 해외 유명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을 포섭해 왔다. 지금도 평양시 동대문구역 문수봉 산기슭에 위치한 률동1동에는 “현지처 촌”이 있다. 이 “현지처 촌”에는 홀로 사는 여인들과 그 자녀들이 살고 있는 단독주책들이 늘어서 있다.

 

거기에서 사는 대부분 여성들의 남편들은 대부분 해외 유명인들이다. 이를테면 평양 아내들과 가족들인 셈이다. 그들에 대한 우대와 관리는 당연히 대남공작부서에서 하고 있다.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피아노 전공을 했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 날 나에게 조용히 자기 아버지는 일본 사회당 원로 정치인이라고 했다. 70년대부터 日北우호 관계의 주역이었다며 자기 어머니는 그 덕에 공화국 영웅이 됐다고 자랑했다.

 

한번은 그의 친구라는 여자애를 만났던 적이 있다. 놀랍게도 그는 아랍계 여성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그리고 훗날 통전부에서 근무하는 과정에 “씨받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씨받이”란 김정일이 70년대부터 당 대남공작부서들을 관장하면서부터 그가 직접 발기하고 추진한 북한식 혼혈정책이다.

 

일본인 메구미를 납치할 당시 남한에서도 김영남이가 납치 됐다. 초기 북한은 훈련으로는 얻을 수 없는 현지간첩의 완성도를 위해 해당 국가의 아이들을 납치 해 간첩으로 훈련시켜 재 파견할 목적으로 이 범죄들을 저질렀다. 그러나 동심이 심히 왜곡된 사람은 성인이 돼서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국가충성을 생명으로 하는 간첩용으로서는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교육용으로 전환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나온 추가대책이 바로 외형은 외국인이지만 태어나서부터 북한 사람인 “씨받이”였다. 북한 대남공작부서들은 흑인, 백인, 아랍인, 동남아인 등 외국 남성들로부터 씨를 받기 위해 많은 여성들을 외국으로 내보냈고 때로는 방북 외국인들을 상대로 임신공작을 감행했다.

 

몇 십년 만에 북한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제킨슨이 자서전에서 자기가 북한을 탈출하려고 결심하게 된 동기 중 하나가 북한 정권이 백인인 자기 자녀들을 간첩으로 고용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증언한 것도 그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햇볕정책으로 남북민간교류가 활성화되면서 통전부의 미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극대화 됐다.

 

내가 통전부에서 근무할 당시 조평통 직원 한분이 나에게 목사 한분을 포섭했던 일화를 말해주었다. 그 목사의 대단한 반공의식과 청렴함이 암초여서 정면방법이 아니라 우회방법으로 포섭했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공간인 호텔 안에서 샤워하러 들어가거나 나올 때 양복 입는 사람은 없다.

 

이 점을 이용하여 샤워 하고 나오는 순간에 나체의 여성이 실수로 방을 잘 못 찾아 들어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 사진으로 당신 교회에 뿌리겠다고 협박했더니 대북지원요구, 자료청탁, 충성강요, 이 세 단계 중 포섭의 첫 단계인 대북지원 요구에 응하더라는 것이다.

 

로버트 박의 성고문 증언으로 봐선 통전부가 약물과 함께 강제적인 비열한 수단을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육체고문이 아니라 수치감과 모멸감으로 괴롭히는 정서고민인 것이다. 나는 로버트 박이 죽음인줄 알면서도 그 죽음을 향해 단신으로 들어갔다는 자체가, 그리고 떳떳이 북한의 범죄를 세상에 더 추가 고발한 것만으로도 과히 열혈 남자다운 행동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시초

 

로버트 박! 그대에게

 

1. 함박 눈

 

그대가

순교의 강기슭에 섰을 때

하늘땅이 손 맞잡고 막아서며

하얗게 내렸던 함박 눈

 

그때 그 함박눈을

어찌 차디찬 겨울눈이라고 하랴

얼어붙은 북한 땅을 체온으로 녹이며

그대가 뜨겁게 흘렸던 기도의 눈물

 

하여 축복하리라

굽어 살피리라

그대의 머리위에 얹으셨던

예수님의 부드러운 손길

 

오! 그래서

그대 품에 원 없이 젖고 싶어서

희생하는 몸인 줄 알면서도

그 사랑에 간절히 매달렸던

북한 주민들의 한 맺힌 소원들

 

2. 외투

 

얼음 위에 발을 올려놓으면서도

차마 따뜻하게 갈 수 없노라

그대가 벗어놓고 간

강기슭의 외투

 

헐벗은 동포들을 찾아가는 길이기에

모진 겨울 함께 하리라

기어이 덜어놓고 간

그대의 더운 온기

 

그대가 남기고 간 그 외투는

고통 받는 이웃들을 잊지 말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부탁하며 남긴

풍요의 양심

 

3. 28살

 

단일민족 반만년

그 영광이 무엇이란 말이냐

독재의 반쪽 땅을 허용하며

오늘도 우리의 삼천리는

분단의 반백년을 넘겼는데

 

아니 우리 7천만이

이리도 못 낫단 말인가

민족의 이름을 외치며

십자가를 짊어진 그 순교자가

아직도 한 생의 반도 못 산

28살! 28살이 아니었더냐

 

4. 두만강

 

북쪽의 두만강은

대대로 눈물이 흐른 강

지금은 흘러 갈 자유마저도

차디찬 독재에 얼어 묶인

비극의 강

 

허나 그대가 넘는 순간

자유의 바다를 알게 된 강

암초에 부딪치고 부서져도

사랑으로 이어짐을 믿게 된

아 성령의 강

 

5. 자유

 

그 어느 시인은 노래했더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도 버릴 수 있다만

자유를 위해서는

그 사랑도 바칠 수 있다고

 

그대는 우리에게 새롭게 깨우쳤노라

자유를 위해서는

사랑도 바칠 수 있다만

더 큰 사랑을 위해서는

그 자유도 기꺼이 버릴 수 있음을

 

6. 인권

 

불쌍한 삶들을 알았을 때부터

같이 춥고

함께 굶으며

살아도 살지 않았던 그대

 

떠나며 남긴

마지막 그 한 마디 속에조차

자기를 구하지 말라며

목숨마저 남기지 않았던 그대

 

순교하는 최후의 기도까지

죽은 자

산 자들을 위하여

모두가 돌려주며 일어선 그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을 위해

자기의 인권을 포기한 그대이기에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보노라

참으로 나누어야 할 우리의 인권을!

 

7. 너를 통해 본 예수님

 

그런 분이시었구나

예수님은 눈물이 참 많으신 분이시었구나

로버트 박! 그래서 그대 또한

북한 동포의 서러움 모아 쥐고

기도하며 울고 또 울었었구나.

 

예수님의 하루는

인간을 위한 배고픔이셨구나.

하기에 민족의 젊은이여

그대도 300만 아사자를 가슴에 묻고

금식 기도로 청춘을 보냈었구나.

 

어쩌면 십자가도

예수님의 속절없는 운명이었구나.

그 핏줄을 이어받았기에

총구를 피한 것이 아니라

기어이 찾아간 그대 아닌가.

 

아 북한 땅이 너무 모질어

원망했던 예수님의 사랑인데

아니었구나. 예수님의 아들인 그대가

12월 25일이 없는 그 땅에

12월 25일을 가져갔구나

[ 2010-10-28, 12:40 ]



가져온 곳 : 
카페 >용돌이 사랑방
|
글쓴이 : 큰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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