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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을 맞이하며

청산(푸른 산) 2014. 5. 12. 22:01

 

★빈하늘
 
충무공 탄신 기념일
정의실천 이순신 장군은 일평생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관으로서 항상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상관이나 권력자에게도 
서슴없이 오류를 지적하는 직언을 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여러 차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늘 정의를 삶의 핵심가치로 삼고 온전히 실천하였다.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장군은 타인보다 본인에게 더 엄격하였다. 
다음 글은 1593년 웅천포 해전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통선 1척을 잃은 것에 대해 장군 스스로 죄를 청하는 장계의 한 부분이다. 
사실 이 통선이 전복된 원인은 부하장수들이 장군의 지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나 장군은 지휘관으로써 본인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통선(統船) 1척을 마침내 전복시켜 많은 죽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이 군사 쓰는 방법이 좋지 못하고 지휘가 잘못된 때문인바, 
극히 황공하여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리나이다." 
-통선일척경복후대죄장(1593.4.6) 또한 장군은 해전에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부하장수들에게 골고루 주고, 
이를 엄격히 평가하여 해전의 상황을 아뢰는 장계에 상세히 기록함으로 
각자 공적에 따라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당시 천대받던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까지도 고루 기용하고, 
이들의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의 군관 정사준이 묘한 법을 찾아내어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삿집 종 안성, 피난하여 
본영에 와 사는 김해 절의 종 동지, 
거제 절의 종 언복 등을 데리고 정철(正鐵)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그 체제도 잘 되었고 총알 나가는 힘도 조총과 꼭 같습니다." 
봉진화포장(1593.8.10) 
1593년 8월 일본의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개량하여 
정철총통을 제작을 아뢰는 장군의 장계에는 
군관 정사준을 비롯하여 대장장이와 천민인 
종들의 이름까지도 세세히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군은 일평생 본인의 신념에 따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의로써 타인을 평가하기에 앞서 
장군 스스로 온전히 정의를 실천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구국의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준 동시에, 장군의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창의정신 창의력은 21세기의 핵심 가치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온 
많은 리더들은 이미 훌륭한 창의력의 소유자들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16세기 이순신 장군 역시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리더였다. 
거북선을 비롯한 장군이 제작한 여러 무기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해전술, 
군경영을 위한 작은 아이디어 하나까지 
모두가 장군의 기발한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거북선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13년 태종 때이지만, 
180년 후 임진왜란을 위해 재탄생된 
거북선과는 구조나 그 성능 면에 있어 많이 다른 것이었다. 
다음은 1592년 6월 2일 당포해전의 전황을 아뢰는 
장계에 묘사된 거북선의 모습이다.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 하더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는데, 이번 출동에는 돌격장이 타고 왔습니다.
" -당포파왜병장 1592.6.14 
돌격전투함 거북선은 우수한 조선의 판옥선을 기반으로 
일본과의 해전에 가장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다. 
전투 시 적진에 돌격하여 적의 진영을 무너트리고, 
사방에 탑재된 포를 자유자재로 쏘아댐으로 
일본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은 이 같은 거북선을 맹선(눈먼배)이라 부르며 무척 두려워하였다. 
이후로 계속되는 해전 중에도 장군은 일본의 주력무기인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접목하여 1593년 8월 
새로운 정철총통을 제작하는 등 
계속적으로 신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장군의 창의력은 전쟁기간동안 군경영의 큰 자원이 되어주었다. 
7년의 전쟁기간동안 장군은 수군의 의식주를 위한 군량확보, 
무기제작과 훈련 등 군경영에 필요한 모든 재원을 
거의 자력으로 해결해야했다. 
이를 위해 장군은 어로작업, 소금제조 및 판매, 
둔전경영, 해로통행첩(선박운행증) 발행 등의 창의적인 여러 행정을 편다. 
특히 과거 둔전관의 경험을 살린 둔전경영을 통해서는 
군량미를 확보하는 동시에 유랑하는 백성들을 둔전 지역으로 모아 
병력 충원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다음 글은 이순신 장군이 둔전경영을 건의하며 
그 이로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군사들의 양식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중략) 관경 경영으로 경작하든지, 혹은 민간에 주어서 소작을 시키든지, 
혹은 순천. 흥양의 수비군들로 하여금 전력하여 농사짓게 하다가 
사변이 생길 적에는 나가 싸우게 한다면 싸움에나 지킴에나 방해됨이 없고 
군량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조진수륙전사장. 1593.9.10 
창의력은 약점을 강점으로, 위기를 기회로, 무에서 유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여,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켜냄으로 
세계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불패의 해전사 이순신 장군은 첫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7년의 임진왜란기간 동안 최소 23번의 해전을 치러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장수이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기록이다. 
어떻게 이런 불패의 신화가 가능했을까? 
철저한 준비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한다. 
해전에 알맞은 방법을 개발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적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무기를 제작한다. 
화력이 우수한 조선의 지자. 현자 총통 및 판옥선과 
거북선 등의 무기를 집중하여 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 정신으로 장군은 매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일본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사상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뛰어난 전략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꾸게 한 
1592년 7월 8일의 한산도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해전이다. 
당시 70여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던 견내량은
지형이 복잡하고 좁아서 아군에게 불리한 장소였다. 
장군은 이 점을 간파하고 적선을 한산도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무방비상태의 적을 "학익진법"으로 집중 공격함으로 대승을 거둔다. 
한산도 해전은 뛰어난 전략가로써의 
장군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전투였다. 
장군은 항상 부하장수들과 전략과 전술을 논의하고 연구하였다. 
동서양의 해전 연구가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해전술을 칭찬하며 연구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함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난 후 이순신 장군은 실제 전투에 
누구보다 용감하게 최선을 다해 참여하였다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을 맞아 싸운 명량해전의 일화는 유명하다. 
엄청난 적 앞에 조선수군의 장수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싸움을 망설이자, 
장군은 부하장수들을 꾸짖으며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함대의 선두로 나아가 전투를 이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에 조선수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였으며 
마침내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전투에서 항상 솔선수범하여 최선을 다하는 장군의 모습은 
많은 부하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그들 또한 장군처럼 전투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임하기전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 전투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줌으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불패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기록정신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전해 줄뿐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때문에 올바른 역사기록을 남긴 인물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을 하는 셈이다.
이순신 장군은 무관임에도 이러한 선물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한 사람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 까지 
약 7년간 진중에서 직접 일기를 기록하였다. 
이렇게 기록된 난중일기와 임진왜란 해전상황을 아뢰는 
장계초안인 임진장초는 
유성룡의 징비록, 선조실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사투를 넘나드는 전쟁 속에서 
장수가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놀라운 기록정신을 가진 장군은 
이렇게 훌륭한 기록을 남겨 주었다. 
난중일기에는 진중 일기답게 전라좌수영 및 통제영의 군영생활, 
여러 해전의 군사전략과 해전상황기록,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 등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장군의 감정과 생각이 담백하게 기록되어 있어 
인간 이순신의 사상과 면모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최고의 자료가 되고 있다. 
매년 1권씩 작성된 7권의 난중일기는 
임진장초, 장군의 편지를 모은 서간첩과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현대에도 이순신 장군의 문집은 다양하게 편집, 출판되어 
장군을 연구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나라사랑, 백성사랑 32세에 무관의 길에 들어선 이순신 장군은 
국토수호 및 나라사랑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변방의 작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 는 
조선 수군의 수장으로서 나라의 바다를 목숨걸고 지켜내었다. 
무관으로써 장군의 나라사랑 길은 평탄치 않았다. 
상관들의 모함으로 파직과 백의종군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해전에서 연승하며 위기의 나라를 구해내는 큰 공을 세우지만, 
죄인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힘든 시련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장군은 1598년 11월 퇴각하는 일본군을 맞아 노량해전 선상에서 
전사하기까지 나라사랑을 굳건히 실천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굳은 나라사랑은 또한 백성사랑으로 이어진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장군은 항상 백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난중일기를 비롯한 여러 관련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
"-견내량파왜병장, 
7월17일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은 
역사적인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장군은 전투 중에 적선을 모두 파괴하지 않고 한 두 척을 남겨두는데, 
이는 도망할 곳 없는 적들이 우리 백성들을 살육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여러 차례 목격된다. 
다음은 명량해전을 앞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을 먼저 안전하게 피난시키는 장군의 모습이다.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띄워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어서 뭍으로 올라가도록 타이르라고 하였다." -난중일기 1597.9.13 3일 후 
조선수군은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과 맞서 싸우는 
명량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재건, 나아가 나라의 존폐가 걸린 중요한 전투였다. 
장군은 이렇게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도 백성을 먼저 생각한 것 이다. 
이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이 후로도 이순신 장군은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이들이 군의 보호 아래 어로와 농사를 통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등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돌보았다.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장군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보는 실천적인 나라사랑의 삶을 보여주었다. 
 알려진바와같이 이순신장군은 극한의 어려움속에서도 
왜놈들과의 전투에서 한번의 패배도 하지 않은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어려움을 결국은 극복해서 결국 승리하고야 마는 이순신의 모습에서 
불멸이라는 단어는 꽤 이순신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보는 이순신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1990년~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 5명과 일본학자 7명 그리고 그 외 
일본 사관학교(육사. 해사) 장교 및 중국 인민박물관장. 
한국 해군사관학교 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간된 책이다
이 책은 크게
이순신장군 생애를 다룬 5권.(이순신은 누구인가?)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2권
명나라가 본 이순신1권
1500~1600년 이 시대의 조선과일본 그리고 명나라 10권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토요토미 대 이순신 2권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권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부친 내용이
7권으로 나누워진 책이다
이 중에서 좀 특이한 것은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이 2권이나 된다는 것인데
이순신 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시듯..
일본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와키자카와 도도. 등
이 두 사람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이 
유별 나다고 한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일본의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 장군 탄생 때 한국을 방문한다
와키자카가 이순신 장군을 알게 된 것은 
한산대첩때 부터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것과 
일본에서 바라 보는 건 차이가 있겠지만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하고,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묘한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전적은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
정도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에 명장이란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것 같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 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글을 아래와 같이 남겼다고 한다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늬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라고 적었다
2천의 군사로 5만 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가 쓴 내용에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이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후손들이 이순신 장군 탄생일에 오는가 보다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은 후일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하루는 어두운 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 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까닭
이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게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 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 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 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 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 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튀어날 뿐만아니라
그 성품과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 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昊땅 모두를 우리 명(明)국으로
귀속 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 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 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 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 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 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 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께 충(忠)을 다 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 를 견제케 하소서
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장수였던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학자의 권유로 참석하 였으며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
이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가득 보여지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 배가 400여년전에 있었단 말인가...(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게 달랐다
더군다나 그 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 라는 
한 인간을 보는 것이었다
일본 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 이라고 붙엿다
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되어서 
바라 보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엇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데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수 있었다
7권은 이순신 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인데
나는 그 7권을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다
책을 손에서 놓은뒤 내게 있어서 가느라한 한숨과 함께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이순신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 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 모든 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 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 들과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 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 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단 한명도 대답이 없다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 후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영웅 중 청일전쟁 그 당시 
누가 있었으면 (한 사람만)청나라를 구할 수 있었을까?"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항우. 제갈공명. 손자. 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 동안 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 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 일거라고 답해주자..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 대해서 30분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이 역시 학생중 단 한명도 알지못하였다
단지 어느 한 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 탓도있고. 황제탓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수군 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되는 군사와 
50 척도 안되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 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도 없이
모두 승리 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안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 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 장군 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 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 보라. 스페인을 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이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전만해도 허약한 병사들이 었으나
그 허약한 병사를 단 1년만에 40만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
교수는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 중 한분이셨으며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시던 중 
1995년 고구려 역사편입하는 작업에서 물러나셨다고 한다
쟝웨이린 교수는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 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것 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
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 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 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 
징키스칸도 그러했고, 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 지는 모르 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볼 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 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였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
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래했듯이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 孝. 義. 愛. 善 을 가르치신 분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 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장군! "
장군님의 혁명과 죽음에 대한 논란
1996. 4월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중에서
(14부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혁명과 죽음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 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단 한번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 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은 
혁명에 성공과 함께 조선의 멸(滅)과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약 5천여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이남. 경상도부근에 이순신을 따르 는 
군(軍)의 수는 1만여명에 이른다
총 3만 5천여명에 다다르고 !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가지의 또 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것 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준것이다 
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전에 또 한번 강력한 이순신 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민심역시 이순신에게 있는것을 알기에)
바로 이순신에게 손을 들어주는것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그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명(明)을 위협하는 오랑케를 견제 하자는 것이다
명나라의 문록(文錄)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 록 하소서
이순신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 줄것이라
신(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등등
이에 명(明)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 이동시키자 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가 있었음 알 수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 선조에게 
우리 명(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명(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역사 조선의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혁명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 한 것이었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을 끌어드려서
북의 오랑캐 (훗날 청나라)를 견제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 장군이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되었을 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한다.
물론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국제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복 잡한 일이다
이순신 장군은 어쩌면 그러한 모든것을 다 아셨는지도 모른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명나라가 장군을 도와주면
낭떠러지에 몰린 조선 왕 선조와 
조정대신 (이순신의 반대파 세력)들이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 되고 비밀협약을 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해 되었을까 하는? 혹시..
이순신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이순신장군은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드라마를 보고 흥분해서 가설을 내세우지만
이순신장군은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정확이 아셨던 분이다
년이 지난 지금 장군께 질문을 던져 본다
장군님 당신은 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조선이 피로 물들여질 거라는 걱정이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신 건가요?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장군님도 홀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건가요
장군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으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이 총32권
그것도 한국 학자 가 아닌 중국학자들에 의해 저서가 된 책
그들은 우리를 알려고 하는데 적어도 우린 저들을 모른다고 해도 
우리 역사에 대해서만은 더 알아야 하지 않을 까요?
우리는 얼마나 그 분에 대해 서 알고 있는지
그 분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씀 이 무엇이 었는지?
이순신의 리더십
졸병(卒兵)이라도 자유롭게 말하게 했다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과
부하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이라는 건물을 세웠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밤낮으로 장수들과 함께 전투를 연구하였는데,
아무리 지위가 낮은 병사라고 하여도 군대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병사들이 군대에 관련된 일을 잘 알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하였으므로 전투에서 패하는 적이 없었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이순신은 신분의 벽을 허물고
졸병들까지도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순신은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청취하여
필승 전략과 전술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졸병들까지도 이순신이 자신들을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부하들의 주인의식과 충성심을 높이고 
사기를 진작 시켰습니다
자신만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잘 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지게 되면 
부하들의 의견도 수렴하지 못하고 충성심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모든 조직의 리더들은 말단 직원들 까지도 직급의 벽을 뛰어 넘어 
그들이 갖고 있는 생생한 정보와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하고 부하들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복잡성과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부하들과의 빠르고 원활한 의사소통과 정보공유가
더욱 절실해 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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